왜 가만두지 않는가
Gyomyung Shin, Hyunmo Yang
Oct 17 - Nov 28, 2026
ROY GALLERY Apgujeong
Curatorial Statement
나는 불이라는 현상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이라고 해서 다른 어떤 현상보다 더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현상은 이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또 다른 현상은 저 사람에게 그러하다. 어떤 현상도 그 자체로 특별히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우리에게는 신비로운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깨어나기 시작한 인간 정신의 한 특징이 있다. 어떤 하나의 현상이 인간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띠게 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의식을 행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틀렸고, 부분적으로는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분명 무언가 옳은 것이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왜 가만두지 않는가》는 인간이 세계를 가만두지 않고 특별하게 만드는 방식과, 특별해진 것들이 의미와 믿음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을 살펴봅니다. 꽤 많은 인류학자들과 미술사가들이 예술의 기원을 종교에서 찾고는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많은 예술은 종교적 의례와 함께해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 체계의 영향 아래 신의 형상을 만들고, 특별한 장소를 장식하며, 정해진 음악과 몸짓을 반복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 온 것이죠. 괴베클리 테페는 이러한 설명이 아주 잘 들어 맞는 장소입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 신석기 유적에는 거대한 돌기둥, 동물의 형상을 한 조각들이 존재합니다. 그 옛날 이런 수고로운 일을 하기 위해선 그들을 움직일 종교와 같은 강력한 믿음 같은 것이 먼저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를 가만두지 않았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항상 거창한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볼까요. 우리는 멀쩡히 있는 돌을 쌓아 탑을 만들고,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지우개 가루를 뭉쳐 '지우개 똥'을 만들기도 했죠. 다 커 버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커피를 마시다 할 말이 없을 때 빨대 껍질을 괜히 접어 아코디언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에 잡히는 것을 만지고, 배열하고, 반복하며 평범했던 것을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정말 무언가를 특별하게 생각할 때만 장식하고, 반복하고, 배열하는 것일까요?
인류학자 엘렌 디사나야케(Ellen Dissanayake)는 종교나 예술 이전에 있었던 인간의 근원적 행동 양식에 주목합니다. 그녀는 인간들이 평범한 사물을 정교하게 만들거나 행동을 반복하고, 과장하는 것을 ‘특별하게 만들기(making special)’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평범한 것과 구별되는 특별한 것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동은 대상의 모습과 함께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주의와 감정도 바꿉니다. 모양을 다듬을수록 더 자세히 보게 되고, 반복되는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다르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행동 기전이 의례, 나아가 종교 같은 믿음 체계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가만두지 않는가》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특별하다는 생각이 무엇을 특별하게 대하게 만드는 것처럼, 특별하게 대하는 행동 그 자체도 어떤 것을 특별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트겐슈타인 역시 어떤 현상도 그 자체로 특별히 신비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든 우리에게 신비로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 안에 처음부터 들어 있는 어떤 신비로운 속성이라기보다, 인간이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대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의식을 행하는 동물(ein zeremonielles Tier)”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설명보다 더 아래에서 작동하는 기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적 의례는 이런 기질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복해서 함께 수행하는 행위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만들고,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왜 가만두지 않는가》는 양현모, 신교명 작가와 함께 시각적 형식을 창조하는 일과 믿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특별하게 다룰 수도 있지만, 특별하게 다루는 동안 그것이 중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었던 모래성이나 지우개 똥에는 그다지 대단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간격을 맞추고, 모양을 되풀이하고, 조금 더 그럴듯하게 다듬습니다. 처음에는 되는 대로 쌓던 모래성도 무너지면 매우 아쉽습니다. 없었던 관심이 만드는 동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애착과 종교적 믿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그 생각이 행동에 앞서 모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적어도 의미와 믿음이 형식을 만드는 일에 언제나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작가들이 작업 후에 작가노트를 정리하면서 자신을 더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의미는 만드는 과정에서 구체화되기도 합니다.
양현모와 신교명의 작업은 이러한 관계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드러냅니다. 양현모의 회화는 시각적 형식과 우리 마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회화를 통해 무엇인가를 강력히 주장하기보다, 의미와 해석을 내려놓고 그저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그리고자 합니다. 양현모는 시각적 형식,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조형의 기본적 요소라고 부르는 색과 선, 면의 조합에 집중합니다. 그의 화면에는 색과 형태, 대칭과 반복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양현모가 붓이나 손으로 거듭 두드린 결과입니다. 그 과정에서 명확해 보이던 수직선이나 수평선들은 흐려지며, 색은 서로 뭉개집니다. 그것들은 이내 빛처럼 함께 일렁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곧 그 묘한 진동들을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양현모의 의도를 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그의 작품들 앞에서 모순적 상황에 직면합니다. 의미를 덜어내려는 양현모의 회화 앞에서도 우리의 눈과 인지는 멈추지 않습니다. 반복된 붓질에 몰입하기도 하고, 흔들리는 색에서 고요함을 느끼거나, 그 안에 무언가 다른 초월적인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그 형식 앞에서 의미를 찾아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찾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양현모의 작품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신교명의 작품들은 의식과 이해를 다루는 ‘중국어 방’ 사고실험과 닮아 있습니다. 그의 기계종은 자기장 변화에 반응해 얼굴에 달린 거울, ‘명두’를 울려 소리를 냅니다. 그들의 리듬은 우리 마음속에 묘한 감정들을 일으킵니다. 기계종은 마치 의례를 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 ‘이일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일오는 기존 화풍들을 학습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백지에서부터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일오의 그림 앞에서 여러 가지 미적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것들은 꽤 아름답습니다. 이일오는 ‘회화’라는 인간의 예술 장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기계종은 자신의 진동을 무엇이라 여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리듬과 화면, 곧 형식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구성한 것이라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그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우리가 느끼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출처를 그들이 가진 의미나 이해에서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교명의 작업은 형식과 의미,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는 우리의 믿음 체계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신교명은 왜 가만두지 않는 걸까요.
두 작가의 작업에서 시각적 형식은 의미가 정해지기를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반복과 배열, 물체의 움직임, 진동하는 색들은 시선을 붙잡고, 감정을 요동치게 하며,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만듭니다. 이 전시에서 어린 시절의 모래성과 오래된 돌기둥, 반복되는 붓질과 기계종의 의례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왜 굳이 세계에 형식을 더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다시 우리에게 무엇을 하게 할까요. 《왜 가만두지 않는가》는 믿음이 형식을 낳는 만큼 형식을 만들고 반복하며 특별하게 다루는 일 또한 의미와 믿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계를 가만두지 않는 것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가만두지 않았기에 의미가 생겨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예술을 만들어낸 원형적 기질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