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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mo Yang's Solo Exhibition
May 31 - Jun 28  | ROY GALLERY Apgujeong

일렁이는 오늘

Exhibition Note

양현모_ 스스로 그러한 회화


윤재영 양평군립미술관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1)


1. 양현모는 원래부터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동안 내가 지켜본 양현모는 솔직하다. 그에게는 위선이 없다. 양현모는 아는 것만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한다. 많은 작품들이 말하려고 하는 동시대에 양현모의 회화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 대신 점(point), 선(line), 면(plane), 형태(shape)와 같은 기본적 조형 요소와 그것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 그 자체를 탐색하는 듯 보인다. 양현모가 그렇다는 것은 《당신의 오늘은 어디인가요》 연작의 개별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양현모가 만들어내는 묘한 색의 일렁거림과 미세한 형태의 진동, 순간적인 점들의 변화만 있다. 그의 작품에서 질문을 찾을 수 있는가? 양현모의 작품에는 주장이 없다. 양현모의 개별 작품에 붙은 <Flexible Forms>라는 이름이 그가 말하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음을 알려준다.


양현모에게는 말보다는 침묵이,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대에서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은 양현모가 추구하는 형식의 몰락과 궤를 함께한다. 우리는 윤리, 정의, 정치,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많은 말들을 예술의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침묵과 형식은 비-미적 가치(non-aesthetic value)를 추구하는 동시대에서 낡아버린 이름이다. 비엔날레 출품작들과 미술상의 수상자 명단을 보라. 이젠 그 누구도 그것들이 중요함을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A를 고를 때, B를 택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라는 직업으로 보아도, 세계 속에 존재하는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보아도 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2. 미술사에서 형식주의(formalism)의 몰락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오염된 세계에서 진짜 예술을 구해내려는 목표를 가졌을 때 이미 예견되었다. 그는 칸트(Immanuel Kant)를 빌려온다. “최고의 취향(Taste)은 최고의 예술이 부과하는 압력 아래에서 발전하고 그 압력을 가장 많이 받는 취향이다. 그리고 반대로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취향이 부과하는 압력 아래에서 생겨난다.”2) 그린버그는 칸트의 취미 판단의 핵심인 미적 자율성 테제를 통해 형식이 스스로 충분하다고 옹호하지만, 그린버그의 주장은 ‘아름다움(the beautiful)’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선함(the good)’에 근거한 도덕 판단에 가깝다. 형식주의를 몰락시킨 수행모순은 그린버그의 삐딱한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세계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염되지도 않았다. 세계는 그냥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3)


형식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예술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 작품은 분석명제이다(Works of art are analytic propositions).”4) 그것은 동시대 미술의 핵심을 예견한 코수스의 천재적 통찰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항진명제(tautology)에 대한 설명을 비튼 것뿐이다.5) 분석명제는 참값을 가리기 위해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6)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라는 명제가 참인지를 알려면 문장의 주부인 총각이 무엇인가만 알면 된다.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 알려면 예술이 무엇인가만 알면 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예술이 유명론(nominalism)적 개념임을 의심하며 개별 작품들의 공통점들을 찾아나갔듯이 겨우 더듬어볼 수 있을 뿐이다.7) 그러나 하이데거가 추적하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있다고 해서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할 어떤 논리적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실에 대응할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예술과 논리, 수학의 공통점은 그것이 동어반복적이라는 데 있다.”8) 그것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는 것과 같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다.”9)


만약 예술,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많은 말들이 항진명제와 같이 동어반복이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탐구할 방법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예술은 어느 정도 기만적이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신이나 종교를 믿듯이 예술을 예술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예술이다’라고 본다.10) 그것은 예술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이 애초에 증명 불가능한 언어일 뿐인데,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예술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세계의 밖에 놓여있다고 말한다.11) 그건 마치 관측이 불가능해 존재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과도 같다. 우리는 여기서 동시대 미술의 수많은 말들에 대해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말이 전부라면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잘 정리한 논문이나 보고서를 읽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우리의 미술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동시대 미술은 비-미적 가치와 그것과 관련된 여러 담론들을 받아들이면서 더 많은 실천적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반대로 그 가능성을 실행할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아트스픽(artspeak)이라는 경멸적 표현이 미술계 밖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는 시선을 대표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2)


3.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보여져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 드러난다. 양현모의 <짧은 진실>은 우주를 닮았다. 왜 양현모의 회화가 점점 우주를 닮아가는 것일까? 그건 그의 붓이 그 자신, 곧 세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추상’을 그리는 작가와 달리 내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양현모는 《일렁이는 오늘》 연작에서 창밖 풍경에 영감을 받았다 밝힌다. 그런데 사실 창밖 풍경이 크게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순간에서 영원을 본다. 그가 본 것은 창밖 풍경이자 “과거이자 미래”이고, 공작거미이면서 “찬란하지만 슬프고”, 바람이자 “싫은 것이지만 반짝이는” 것이며, 도시 위에 떠오른 별이지만 “나와 밀접하거나 닮아 보이는” 것이다. 양현모는 “잴 수 없는 것을 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본다. 그것은 안에서-보기이자, 신비한 사건이다.


양현모는 자신의 양식(style)이 계속해 변화하는 것을 불안해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분명 그것은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와 빨리 발을 맞출 수 있는 영민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멸을 걱정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현모를 깊게 알지 못했던 나의 오판이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 나=세계를 그리려 한다는 것은 사실, 《Burning Symmetry》 작업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거기서 붓으로 캔버스를 두드릴 때, 《Shield》 연작이 방패가 아니라 일종의 문과 같이 느껴졌을 때, 그가 작업 노트에서 지속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본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다시 원고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부터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양현모가 “잴 수 없는 것을 재려고” 하는 것,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그의 불안의 제 1 원인이다. 그것은 잰다고 잴 수 없는 것이며,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Flexible Forms 07.02>의 구성원리가 그러하듯, 자신의 불안을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선은 보통 무작정 일렁거릴 것만 같은 화면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화면을 3분할로 만드는 수평선과 거기에 교차하는 수직선은 시선을 정지시키고, 색이나 비정형적 형태의 과한 울렁임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양현모의 작품에서 대부분 직선은 주어진 삶을 뚜벅뚜벅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를 은유한다. 그는 불안을 떨칠 수 있을까? 그것이 완전한 의미의 해탈이나 구원을 의미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양현모가 바라보는 길이 앞으로도 세계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면 그가 걸을 길은 언표 불가능한 것이기에, 불안의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솔직한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는 고유한 길이기도 하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넌센스이다.


종국에 양현모의 작품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는 보는 사람의 맥락에 달렸다. 그의 작품이 제공하는 미적 경험의 특별함은 그것이 우리에게 나=세계를 알려줄 수 있는 일종의 조형적 장치라는 것이다. 예술은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그러한 세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양현모의 작품에서 보아야 할 <짧은 진실>이다. 강단에 설 수 있는 단 두 종류의 철학,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예술과 세계에 관해서 논할 때만 다시 만난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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