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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gwang Yun's Solo Exhibition
Jul 12 - Aug 9  | ROY GALLERY Apgujeong

Huh, Hu?

Exhibition Note

모자를 쓴 야만인


이선영(미술평론가)


윤성광의 작품에는 개, 원숭이, 고릴라 등 여러 동물의 특징이 조합된 돌연변이 괴물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엄연히 현대적인 복장을 갖춘 초상이다. 그것은 작가의 취향들을 반영하는 자화상적 위상을 가지는 캐릭터다. 개는 인간과 가장 친숙한 반려동물이며 원숭이나 고릴라는 진화론적으로 가깝다. 그가 만든 괴물이 전적으로 낯설지는 않은 것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순수와 위험]에서 신성함은 천지창조를 할 때 범주를 명확하게 구별할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분류체계는 반드시 비이례적인 것을 낳기 마련이며, 모든 문화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한다’. 괴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존재다. 하지만 ‘예술의 풍요로움은 이러한 애매함을 이용하는데 있다’(메리 더글라스) 이는 괴물이 문화나 예술에서 자주 호출되는 이유다. 작가가 특별히 성(性)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무의식 속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영한다. 


즉 그것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면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다. 긴 머리와 패션 소품 등을 착용하고 계좌(ISA)를 보고 있는, 여성으로 보이는 캐릭터도 있지만, 남성성을 숨기기는 힘들다. 그의 캐릭터에 함께 박혀있는 ‘garden’, ‘superstar’을 비롯해서 반쯤 가려진 로고들은 알만한 사람은 알아보는 브랜드명이다. 작품에서 굳이 그것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그 또한 작가도 몸 담그고 있는 현대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패션 소품들의 화려한 색상은 그만큼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현대는 원시성을 배제하면서도 포함한다. 문명은 야만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길들이려 한다. 괴물이 여러 종의 경계에 걸치는 존재인 만큼이나 여러 초상들은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이다. 화가 나거나 흥분한 듯한, 공격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표정만이 유사하다. 야수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뭔가 주장하는 그는 매 순간 스마트하기를 바라는 사회관계의 외피를 찢어버린다. 


그의 캐릭터는 화가 잔뜩 나 있고 이를 직선적으로 표출한다. 작품은 자기 안에서 뭉쳐 쌓여 있는 것들을 배출하는 유력한 통로가 된다. 또한 그것은 영상이나 문학처럼 말할 수 없는 미술이 무언극과 닮았다는 것, 그래서 실제보다 과장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크로스백을 두 개나 매고 춤추듯 손을 올리는 캐릭터는 팔이 세 개이며, 양쪽 발 크기도 큰 차이가 난다. 그것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서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손발톱에 여러 색의 메니큐어를 칠해 몸동작을 강조하고, 하얀 눈동자와 이빨들이 마치 어두운 안색과 대비시켜 감정 상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현대사회는 표면적으로만 스마트할 뿐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괴이한 도상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다. 좋은 힘이든 나쁜 힘이든 얄팍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물론 그러한 힘이 증폭되는 것은 질서(구조, 제도 등) 때문이다. 힘은 결코 힘 그자체로 발휘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시적 초상에 여러 현대적 기표들이 박혀있는 이유다. 대량 생산/소비사회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편재하며 영향력 있는 기표는 상표다. 서로 대화하는 듯한 두 존재가 그려진 작품에서 얼굴 보다 모자의 응집성이 더 강하다. 극단적 감정의 분출로 흐트러지려는 얼굴을 모아주는 것은 바로 모자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정체성과 소비 취향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얼굴을 가리면서도 존재를 드러내는 모자는 갑옷처럼 개체를 보호한다.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는 작품(막스 에른스트)과 시집(김상미)도 있지 않은가. 윤성광은 평소에도 늘 모자를 착용하며, 모자 수집광이다. 모든 수집을 추동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이다. 만약 대중이 딱 필요한 기능적 소비에만 머문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돌아가지도 유지되지도 않는다. 주/객관적인 이유로 적절한 정도는 유지되기 힘들다. 그러한 소비/수집 품목을 장착한 그의 캐릭터는 현대문화의 메카니즘을 압축하는 도상이다. 


캐릭터의 과도한 표현 방식은 얼굴의 경계선을 사라지게 한다. 색채도 자율적이어서 붉은색이나 고동색, 형광색이나 샛노랑 얼굴도 있다. 전형적인 초상화에서 보여지는 섬세한 음영 처리가 없고 원색의 거친 얼룩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가상적이다. 얼굴은 기관이 배치되는 바탕이며 기관 간의 조율은 없다. 거대한 스피커같은 입과 놀란 듯 화난 듯한 동그란 눈은 세상을 향한 표현을 쏟아내는 구멍들이다. 얼룩같은 얼굴 실루엣만 등장하는 작품은 어두운 바탕에 가면처럼 떠 있다. 오렌지색 눈빛과 초점이 맞지 않은 눈동자에는 광기가 서려있다. 하얀 눈처럼 흐트러지는 세상이 그 배경이다. 윤성광의 작품 캐릭터에서 자주 발견되는 과도한 흥분상태는 조광증과 유사하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의하면 조광증은 극도에 이른 신경섬유의 긴장이 특징이며 대담성과 격분이 뒤따른다. 신경 섬유가 느슨해져 더 이상 외부세계와 공명할 수 없는 우울과 달리, 조광증은 모든 외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크게 벌린 입은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창구멍처럼 그 비중이 크다. 부드러운 혀와 날카롭고 강한 이빨이 대조되는 입 부위는 대개 얼굴의 반을 차지한다. 어떤 것도 다 소화시킬 수 있을 법한 왕성함이다. 벌린 입과 드러낸 이빨은 동물성을 강조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동물의 범주를 가축, 야생동물, 괴물, 또는 만들어진 동물들이라고 나눈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그 각각은 길들임을 통한 정복 의지, 짐승같은 성격이나 야만성에 대한 두려움, 정체성의 혼합과 상실에 대한 강박관념을 나타낸다. 윤성광의 동물성 캐릭터는 입 뿐 아니라 눈구멍 콧구멍 등 안과 밖을 연결시킬 수 있는 부위가 강조된다. 안과 밖이 연결되는 이 구멍들은 생존을 위한 필수지만, 오염에 취약한 영역이기도 하다.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육체의 경계는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모든 경계를 상징할 수 있다. 모든 주변부(가장자리)는 손상받기 쉬운 부분을 상징한다. 


인류학자들은 이 취약한 경계에서 발생되는 비천함과 신성함의 양가성을 주목해왔다. 윤성광의 작품 속 캐릭터는 이빨을 한껏 드러내며 분노의 말을 쏟아내지만, 그만큼 밖으로부터 상처받았던 것이다. 일방성이 아닌 되돌려줌이라는 행위 속에 카타르시스가 있다. 몸과 정신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마음이나 정신에 있어서의 정상/이상의 경계도 유동적이다. 그의 작품은 인류의 상상력이 동물에게 무의식과 광기를 투사해 왔음을 보여준다. 자연인 동물은 ‘만물의 척도’인 인간에 의해 정복된 타자로 여겨져 왔지만, 억압된 타자는 모양새를 달리하여 회귀한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 이성과 광기 사이에 긴밀한 교류가 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의 수용시설에 수시로 출몰하는 것은 일종의 동물성의 이미지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광기는 짐승의 모습을 띤다. 광기에 동물성이 현존한다는 생각은 질병의 징후와 본질로 여겨지게 됐다. 하지만 질병 또한 죽음만큼이나 생명 과정의 일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루는 예술은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주어진 화면을 넘지는 않는 강력한 에너지는 정지된 형태를 무너뜨린다. 크게 뜬 눈과 어금니까지 보이는 입은 그것은 명확한 발음으로 메시지를 또박또박 전달하기보다는 어떤 힘을 수행한다. 그저 뱉어내고, 소리치며 노래한다. 말하기는 광기를 즉시 알아차리게 하는 통로다. 광인은 횡성수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광인의 언어 또한 동물이나 광기만큼이나 회귀하는 타자들이다. 미셀 푸코가 광기를 진지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현대사회가 상징을 기호로 타락시켜 세계와 언어의 깊은 관계를 사라지게 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그 결과를 말과 사물의 분리에서 본다. ‘눈은 이제 보기만 할 뿐이고 귀는 듣기만 할 뿐이다. 여전히 담론은 있는 것을 말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지만 그것은 다만 말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푸코) 이윤을 낳는 노동에만 가치를 두는 생산중심의 분업 사회가 바로 그렇다. 


예술도 분업의 일환이 될 때 일개 기호로 강등된다. 이쯤에서 요구되는 것은 형식적 말밖에 할 말이 없는 ‘순수’의 기호를 ‘오염’(메리 더글라스가 의미한 바) 시키는 일이다. 윤성광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장착한 아이템들의 다양성에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도가니같은 열기가 느껴진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와 원시문화]에서 인류학을 참고하면서 브리콜라주(bricolage) 또는 잡동사니 주워 모으기는 레비 스트로스가 ‘원시적’ 또는 ‘야생적’인 사고형의 특징이라고 본 것인데, 구술적인 인식상태에 입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윤성광의 작품 속에 단편적으로 들어가 있는 말들은 직선적 인과관계를 갖춘 문자이기보다는 구술적이다, 6개의 화면이 연결된 작품은 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장착한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같은 크기의 화면에 담긴 초상들은 도상의 다양함이 가늠되는 기준이 된다. 


서로 유사하지만 똑같은 반복은 없는 계열들은 차이의 유희를 보여준다. 어금니는 물론 혓바닥까지 드러나 있는 캐릭터는 입으로 배설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모델에 의하면 배설물은 몸 밖에 있어야만 하는 ‘다른 것’의 대표자다. 현대의 문화와 예술에서 보이는 배설적 충동은 이질성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이다. 줄리언 페파니스는 [이질성의 철학]에서 현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질성이 추방한 이질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철학자 바타이유는 이질성(the heterogeneous) 이론에서 과학으로 대표되는 분석적 방식은 동질적인(homogeneous) 정신 절차로, 불가능성의 경험에 제한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탈근대주의는 비동일성(nonidentity)의 사유’(줄리언 페파니스)를 드러낸다. 윤성광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호들은 변형을 통해 이질화된다. 물건은 상품으로서 출시될 때 목표로 한 코드를 벗어나 개별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합목적적인 기능만큼이나 과잉의 유희가 있다. 


예술 또한 이 끝없는 욕망의 한 축에 자리한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은 [작은 물건들의 신화]에서 구매는 광고로 인하여 그 물건들을 둘러싸게 된 기호들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이 물건들이 일단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나면 결정적인 것은 그것들의 구체적인 사용일 뿐, 더 이상 기호는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란 ‘몸짓들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이미지나 언어의 끊임없는, 그리고 의식(儀式)적인 해설인 셈이며, 개인과 사회의 기반을 이룬다’(세르주 티스롱). 윤성광의 작품에서 모자에 배낭, 보드 위에 올라탄 채 한 손에 커다란 카세트를 든 인물은 최소한 1980년대까지도 소급될 수 있는 전형적인 청년 패션이다. 레게 스타일의 머리나 큰 카세트, 춤추거나 노래하는 모습은 젊은이들의 생태계를 이루는 음악적 분위기가 충만하다. 자신이 몸담그고 있는 문화를 표현하는 1999년 생 작가의 작품에는 곳곳에 하위문화의 코드가 발견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 그린(2023년) 것이지만, 관객의 동선에서 맨 마지막을 차지하는 작품에는 유난히 문자들이 많다. 입의 위치와 연결되어 캐릭터가 내뱉은 말이나 노랫말처럼 보인다. 말자체가 음악이 된다. 빠르게 쏟아내는 가사는 자기가 아직 속하지 못한(않은) 세상에 대한 도전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다. 환각버섯의 이미지나 ‘acid’같은 단어는 낙서같은 하위문화에 편재하는 중독이나 도취, 이완이나 열락, 신비나 해탈같은 코드들이다. 그가 자주 착용하는 그래픽 티의 구성처럼 이미지와 레터링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작품 속의 옷들은 이미 출시된 그래픽 티를 약간 바꾼 것들이다. 작품 제목을 포함하여 문자적 이미지는 구체적 서사라기 보다는 시각적으로 해석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뭘 그려야겠다는 아니고 완성시킨 다음 제목을 붙인다. 하위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전시들이 대개 총체적 분위기 연출에 집중한다면, 윤성광의 전시장은 단순하고 강렬하게 하나하나의 작품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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